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가의 계곡 (문단 편집) == 도굴 == ||[[파일:Tomb-Robbing-in-Ancient-Egypt-tomb-raiders.jpg|width=100%]]||[[파일:c85244a8ae829152c4170bf2cebe81fa.jpg|width=100%]]||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도굴꾼|재물을 노리는 작자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왕국 말기에는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는 바람에 무덤 노동자들에게 임금 체불이 일상화되었고 그동안의 후한 대우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은 빡쳐서 무덤을 털어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몰래 무덤 입구와 도굴로를 동시에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장례식이 끝나면 도굴로를 열어서 전부 털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일은 파라오뿐만이 아니라 왕비, 왕족, 귀족, 평민들까지 가리지를 않았다. 심지어 어느 귀족의 경우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 몰래 침입해서 보석으로 치장한 [[데스마스크]]를 털어가는 사례도 있었고 [[람세스 3세]]의 왕비 이시스의 경우에는 무덤 노동자들이 몰래 뒤에 굴을 파고 털어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값비싼 부장품들이 시중에 공공연히 유통되면서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이집트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추락하는 악순환이 여전했다. 사실 이런 심각한 사실은 그 당시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20왕조 말기의 파라오 [[람세스 9세]] 때 대대적으로 조사를 했다. 제11왕조부터 제20왕조의 무덤 16개를 조사했으나, 그 중에 제18왕조 2번째 파라오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과 11왕조 인테프 2세의 무덤을 제외하면 모두 털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당시에는 '''사제들과 귀족, 도굴꾼이 한 패'''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재정이 부족해진 21왕조 파라오들은 선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을 보충'''하는 등 [[막장]]이었다. 예를 들면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람세스 9세의 반지와 19왕조 파라오 [[메르넵타]]의 관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전 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은 물론 부장품으로 재활용했다는 좋은 증거이자 일례다. 이 당시 도굴꾼을 처벌한 기록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는 17왕조의 파라오 소베켐사프 2세와 그의 아내 누브카스 왕비의 피라미드 무덤[* 17왕조는 중왕조와 신왕조 사이의 혼란기였던 제2중간기였다. 고왕조와 중왕조 사이에도 제1중간기라는 [[현시창]] 시기가 있었으나, 이때 파라오의 권력이 추락하고 많은 무덤들이 도굴되었다. 제2중간기는 이민족이었던 힉소스의 침입을 받아 남북 대결을 하던 시점이었는데 당시 무덤은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무덤이 아니었다. 암굴을 만들거나 땅에 매장해서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세워 표시하는 무덤이었다.]을 도굴꾼 아멘파누퍼와 그 일당들이 약탈한 사례가 있다. 왕가의 계곡 부근에 있었던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던 아멘파누퍼는 이전에도 도굴을 하다가 잡혔다가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고 풀려났었는데, 고위 공직자들과 결탁하여 도굴을 하다가 기원전 1111년에 람세스 9세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도굴꾼들은 이 무덤을 약탈하여 부장품들을 싹쓸이하고 왕과 왕비의 관에 불을 질러 관에서 금 14.5kg을 녹여 훔쳐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에 불을 지른 이유는 미라를 불태워서 [[저주]]를 막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도굴꾼들은 미라가 [[부활]]할까봐 겁을 먹고 미라를 불태워버리거나 훼손하기도 했고 땅 속에 파묻거나 심지어 기념품(!)으로 챙겨가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1왕조의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의 경우에는 도굴꾼들이 무덤을 털고 무덤 벽에 파라오를 조롱하는 그림과 낙서까지 하고 갔을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